DISCLAIMER: 조.. 좀 재수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나는 일 중독, 공부 중독, 성장 중독이다. 따라서 지금 구글에 내 이름을 치면 첫 페이지에 나오는 "구종만은 언제 공부가 질릴것인가." 라는 질문의 답은 '안질려요, 아마' 일 것이다. 흠.
나의 일 중독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ACM ICPC 대회를 준비하던 1학년 겨울방학쯤이다.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밤샘 코딩을 포함해서 -_- 겨울방학 내내 잠-코딩-밥-코딩-밥-코딩-잠의 생활을 반복하곤 했다. 평생 그렇게 뭔가 열심히 해본 적이 없던 내가 뭘 잘못 먹었길래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한 것일까? 코딩이 그렇게 재미있어서였을까?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절이 내 실력이 느는 것을,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게 느껴지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직도.. 12월 모의고사에서 우리가 토멕네 팀 뒤로 2등했을 때 느껴지던 '와, 내가 이만큼 늘었구나' 라는 느낌을 기억한다. 어제 모르던 것을 오늘 배우면 내일은 못 풀던 문제를 풀 수 있었고, 같은 것을 짜더라도 전보다 좀 더 빠르고 간결하게 짤 수 있다는 것이 확확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성장' 이란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동기 (motivation)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슬래시닷의 카르마 쌓기 (...), 탑코더에서 레이팅 올리기, 심지어는 취업 시장에서 스펙 쌓기까지, 성장이라는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성장이라는 동기를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일 것이다. 캐릭터 레벨을 올리고 장비를 갖추고, 전에 갈 수 없던 지역에 가고 칭호를 얻는다. 나는 게임을 정말 안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게임 중독자들을 너무나도 잘 이해한다. 나는 그들이 게임을 할 때 느끼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고,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공부를 하고 싶은데, 다른 일이 바빠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 쓴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레벨업을 절실하게 해야 하는데 컴퓨터가 고장난 와우저의 심정으로 매일매일 잠이 든다.' ... (나지만 이쯤 되면 정신병인거 같다)
그렇게 성장에 중독되어버린 후로 나는 그냥 쭉 달려왔다. 지금까지 이룬 것이 있다면, 그리고 앞으로 이룰 것이 있다면 그건 내가 커다란 야망이 있어서도 아니고, 머리가 비상해서도 아니고, 단지 '아 시발 이것만 잡고 잔다' 라는 게이머와 똑같은 기분으로 '아 시발 이것만 하고 잔다' 라면서 해 보고 싶은 공부를 해 왔기 때문이다.
대체 왜 나한테는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실 나는 프로그래밍 대회가 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다시 2002년 겨울 이야기를 해 보면, 그 당시의 나는 성장하기 딱 좋은 환경에 있었다. 월드파이널에 진출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생겼고, C 위에서 모든 자료구조를 직접 짜 가면서 코딩하다가 C++ 과 STL 을 쓰기 시작하니 그에 따른 생산성 향상도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 것은 '피드백' 이었다. 단순히 소스 코드가 맞는 답을 내는지를 판정해 주는 것만 해도 큰 의미가 있지만, 더 큰 것은 경쟁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는 피드백이다. 내가 얘보다 문제를 빨리 푼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이번엔 이걸 내가 더 빨리 풀었다. 내가 랭킹에서 얘를 이긴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이겼다. 그만큼 성장한 것이다. 이런 피드백들은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강하게 실감하게 해준다. 이거 좀 더 하니까 좀 더 빨라졌다. 이거 좀 더 하니까 못 하던 것을 할 수 있다. 그 기분만큼 즐거운 게 어디 있을까.
프로그래밍 대회는 자신이 짠 프로그램에 대한 피드백이 실시간으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프로그래밍과도 다르다. 코드 리뷰와 유닛 테스트는 대안이 되어 줄 수는 있지만 결국 한계가 있다. (프로그래밍 대회에서도 물론 한계는 있다 -_-) 하지만.. 프로그래밍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코드 리뷰와 유닛 테스트는 사치일 뿐이다. 나는 남들이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배우지 못하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창구가 있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고, 비교적 더 빠르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 얘기하다 보니 프로그래밍 대회 예찬론으로 다시 넘어왔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강력한 피드백이란 존재는... 현실 세계엔 별로 없다. 난 오늘 하루종일 코드를 짰지만 그 코드 아무도 안 봐준다. 회사에서 퍼포먼스 평가.. 일년에 한 번 있다. 내가 오늘 한 줄 공부 더해봤자 올해 안에 그거 써먹을 일은 없을 것이니, 하나 안 하나 내 인생에 뭐 달라질 게 보이는 건 없다. 그런 환경이 수많은 직장인들을 단지 '샐러리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사람이 되도록 만든다. 이 환경 하에서 계속 성장하려면 다른 길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한 달마다 목표를 쓰고, 내가 한 일들을 파악하고, 진도를 체크하는 것이 내 나름의 답이다. 솔직히 뭐 대단한 것이 있다고 이걸 남들 다 볼 수 있는 홈페이지에 올리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길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 무얼 원하는지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과거처럼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스스로 갈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쭉 앞으로 나아가서, 끝에 가서 뭐가 되고 싶은가, 뭘 이루고 싶은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의 나보다 좀 더 성장한 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확실하다.


